돌이켜보면 생에 큰 깨우침의 순간이 몇번 있었다. 아이의 '85점 사건'은 나와 아이를 삐뚤어진 교육에서 해방시키고 인생관을 바꿔준 일이었는데, 강의 때 종종 얘기하곤 한다. 아이 초등학교 5학년까지 무식하게 공부시켰다. 학원을 보내며 레벨을 올리기 위해 개인 과외까지 시키는 엄마, 그게 나였다. 시험 전날은 거의 두세시까지 들들 볶으며 문제집 세권네권 풀게 했고.
그래도 4학년 정도까진 만족스런 성과를 냈는데, 5학년 첫시험에서 수학 85점을 받아왔다. 선생님이 부르시더니 아이 공부 더 시켜야 한다고, 반 평균이 90점이라는 것이다. 그 때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철철 났다. 좌절과 분노가 아니라 뜨거운 각성이 일어났는데 우선 아이에게 미안해서 내가 너무 바보같아서 계속 울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대화했다. 아이가 힘들다고 하는 모든 학원들을 끊었고, 하고 싶어하는 것만 남겼다. 대신 책임에 대해 가르쳤다. 모든 공부는 스스로 하라고 했고 결과에 대해서도 혼내거나 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 다음 시험에서도 85점을 받아왔다.ㅎㅎ 결국 아이 그릇은 85점이었던 것. 나는 계속 내 욕심 200점을 들이붓고 있었던 거다.
엄마가 해줘야 하는 일은 아이의 그릇을 넓혀주는 일이어야지, 작은 그릇에 점수를 욱여넣는 일이 아닌 것. 깨우침 뒤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모든 학업은 아이 스스로 책임지게 했는데 자기 능력껏 해나가더라고. 물론 스카이도 아니고 멋진 스펙도 아니지만, 자기 삶의 모든 일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고 즐기고 누린다.
오늘, 엄마와 아이들 함께 참여하는 강의였다. 아직 젊은 엄마들과 초등학생 아이들이 내 눈엔 같아 보였다. 지나온 자의 라떼는 얘기일 수도 있고 겪은 자의 조언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저 인생 선배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준비해간 '종이 미술관'에서 각자 마음에 들어온 그림으로 15분 글을 쓰게 하였는데, 오늘, 눈물 바다였다.
똑 닮은 모녀가 박래현 <여인>으로 글을 썼는데, 먼저 열살 딸이 발표했다.
ㅡ한 엄마가 남편 회사가고 다들 학교 보내고 집안일 하기 귀찮아 하고 있다. 남편 오면 집안일 왕창 시키고 아들한테 집안일 좀 거들라고 해야지!...ㅡ
사람들은 다 같이 웃었고 이어서 엄마가 발표했다.
ㅡ날 업어주던 엄마의 등이 어느새 굽어졌다. 설거지하러 가는 엄마의 뒷모습, 일하러 가는 엄마의 뒷모습, 어두운 거실에서 기도하던 엄마의 뒷모습, 나도 이제 엄마가 되었는데 엄마는 힘든 걸 어떻게 견뎠을까. 늘 웃으며 마주한 엄마의 뒷모습 뒤로는 지친 뒷모습이 있었겠지.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해야지.ㅡ
엄마가 이 글을 울먹하며 읽었는데, 아이가 그만 눈물이 터져버렸다. 엄마의 그런 마음 처음 들었을 것이다.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겠구나 처음 깨달았을 것이다. 아이와 엄마가 꼭 껴안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는데, 그걸 보는 우리 모두 다같이 눈물이... 가족 수업을 할 때 이런 광경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는 몹시 가깝고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슴 깊은데 있는 진짜 나를 드러내기란 어렵다. 때로 그림 한 점이 놀라운 매개가 된다. 오늘 모두들 그림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한껏 표현하고, 서로 안아줬다. 아직 돌도 안된 아기를 안은 채 8살 딸과 함께한 엄마는 아이에게 편지를 써주었는데, 동생에게 신경쓰느라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이는 엄마의 글을 듣고 눈물이 그렁그렁. 나도 그렁그렁.
ㅡ아이들에게 다 가르쳐야지, 교육해야지 생각하지 마세요. 엄마도 배우는 중이라고 얘기하세요. 그림이 좋은 건 수평적인 대화를 하게 해주는 거예요. 처음 보는 그림은 처음 맞닥뜨리는 세상이니까요. 그림 한 점 두고서 서로의 관점과 마음을 이야기하세요. 물음표와 느낌표를 아낌없이 쓰세요!ㅡ
젊고 부족한 엄마였던 내가 떠올라 뭉클해졌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오늘은 딸과 만나 함께 퇴근했다. 예술의 진짜 효용은 마음의 매개에 있다. (바로 가기)